the year of crafts의 서막^^
기쁘게 일하고 해놓은 일을 기뻐하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더라.
이름답게 재활용 백으로 사용하면 좋을것같다.
나는 내 마음이
건어물이란 표현이 아주 적절하거나,
햇빛에 바랜 듯 그 빛깔을 잃어가거나,
또는 그 비슷한 무엇이 되어가는 줄 알았고,
내심 그걸 반기고 기뻐했다.
그게 아마도 속세의 삶에서 다다를 수 있는 해탈의 경지일꺼다 생각하며...
그런데 내 마음은 단단히 봉인된 판도라의 상자가 되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영화가 끝날 무렵 순간 어이없이 봉인해제를 당하고 보니 그랬다.
이 놈의 마음은 어떤 것도 놓고 있지 않았다. 단단히 봉인된 상자 안에 차곡차곡 쟁여두고는
없는 척, 모르는 척, 아닌 척 하고 있더랬다.
나도 모르게...
며칠은 너무 속이 상하고 마음이 아파 누구와도 섣불리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안뜨기. 겉뜨기.
넷째 줄에 한번 꼬고 여덟째 줄에 다 꼬고,
첫번째는 앞으로, 두번째는 뒤로...
한 코, 한 코... 단순한 규칙에 집중, 반복하다보니
시간이 어찌 가는지, 세상은 어찌 돌아가는지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
예전에 감은 좋아하는 과일이 아니었다. 신맛도 없이 너무 달기만해서.
그런데 나이 탓인지 문뜩 그 맛이 그리워 홍시 몇 알을 사보면 그 맛이 아니다.
단 걸 그닥 탐하지 않아 예전보다 좀 덜 달면 차라리 좋아할 텐데 요즘 홍시의 단 맛은 그 기대에도 못 미친다.
그래서 대개 이맘 때 쯤 과일가게에 홍시가 탐스럽게 쌓여 있어도 못 본 척 지나치건만 오늘은 혹시나 해서
제일 좋은 놈들로 과일가게 아줌마에게 몇 번을 되물으며 달다해서 사왔는데, 역시…
이건 감으로서 심지어 옳지도 않은 맛이다. 보아하니 일반 유통되는 홍시에서 옛맛을 기대하긴 틀린 일같다.
옛 맛이 아닌 것이 홍시만은 아닌데 또 뭔가를 영영 잃어버렸단 마음에 참 서운하다.
말은 잊어도 맛은 잊지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말도 안 잊었는데 어떻게 맛을 잊었을까...
그립다, 옛날 그 맛들이.
홍시, 곶감, 밤고구마. 토마토, 사과, 귤, 복숭아, 딸기, 쇠고기, ...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할머니마냥 옛 타령이나 하며 이러고 있다. ㅎㅎㅎ
오랫만에 가까이 않던 큰병원을 좀 다니게 되다보니 여러 상황이 유감스럽다.
아픈 것만으로도 서글픈 환자는 칼자루까지 병원에 잡히고 참 무기력한 존재구나...
아픈게 죄지 뭐... 그런 느낌.
의도하지야 않았겠지만, 결과적으로 말 그대로 생고생을 시키고도
‘네가 특이체질인 걸 어쩌니? 내가 네 특이체질까지 알아야하니?’의 태도를 고수하는 의사에게
‘너 참 한심하구나’ 하는 시선과 어조로 할 말은 해줬지만
미안하다는 말을 듣기는 커녕 유감스러워하는 표정조차 보지 못한 것이 못내 분하고
그런 자를 의사로 믿었던 것이 분하고
그 자의 태도가 이 나라 의사로서 별로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것에 새삼 답답하다.
흑흑~~~
http://www.npr.org/2012/10/08/162369606/piecing-together-the-worlds-largest-jigsaw-puzzle
매우 흥미로운 기사.
동독 비밀경찰이 남긴 민간인 사찰에 관한 찢겨진 문서를 jigsaw퍼즐을 맞추는 컴퓨터의 pattern recognition 기술로 복원하고 있단다.
서가 90km 정도를 채울 수 있는 양의 기록이 만들어졌고, 파쇄해서 버릴수 있을만큼 버리고, 기계도 고장나고 시간에도 쫓겨 손으로 찢어자루에 담아 버리려다 남은 것이 16,000자루한다. 헐~~~
민간인 사찰이 남의 일이 아닌 나라에서 살다보니, 이젠 컴퓨터 하드디스크에 그 많은 것들이 참으로 간단히 깔끔히 그래서 처리도 쉬운 방법으로 저장되고 있겠구나 섬뜩하기도 하고, 참 엄청난 과거를 포기하지 않고 끝내 제대로 청산하겠다는 의지가 부럽기도 하고, 컴퓨터를 이렇게도 쓰는구나 흥미롭기도 하고...
아뭏든 재밌다.
서두르지 않고 일어나 아침 먹고
식기세척기 시켜 설거지하고
룸바시켜 청소하고
에스프레소 뽑아 우유 뜸뿍 넣어 한잔…
Oops… ^^ 책상에 커피를 쏟아, 이 참에 책상도 한번 구석구석 닦아 주시고
아침 햇빛 가득한 방 책상에 앉아 새삼스레 깨닫는다. 더 바라며 살면 안된다는 것을.
그리고 곧 또 깨닫는다. 곧 까먹을 깨달음이라는 것을. ㅎㅎㅎ
그렇거나 말거나 아뭏든 오늘은 행복~~~
http://www.npr.org/2012/09/06/160627856/why-your-cell-phone-could-be-called-a-tracker
어떤이가 요즘 휴대 전화의 대부분인 스마트폰이 전화기의 용도가 아니라 뭔가를 추적하고 추적 당하는 용도로 더 많이 쓰이니 추적기라 부르는 것이 옳지않겠나 주장한다.
공감.
휴대전화란 이름이 더이상 현상을 반영하지않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유지되는 이유는
그렇게 불러왔기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기기에 담겨있는 불편한 진실이 드러나지않길 바라는 마음 때문인것 같기도하다.
(요즘 스마트 기기를 가만 들여다 보면 편의를 가장한 검은(?) 속셈이 너~~~무 보인다. ^^)
일주일 한 번 네 달 동안
새벽5시에 일어나 6시에 집을 나서 8시에 강원도 모처에 다다라
9시부터 5시까지 그래도 혹시나 기대를 놓지않으며
진이 빠져 말문이 막힐 때 까지 뭐든 가르쳐보려했던 나는
결국…
소귀에 경을 읽은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도 좀 알아듣던 것 같은 녀석들의 답안지 조차 ‘헐~~~’ 소리가 저절로 나오게 만든다.
씁쓸씁쓸씁쓸…
그런데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건 그 쉬운 것 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아니다.
그건 뭐 그럴 수 있다. 뭐든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없으니까.
태생적으로 추상적 사고가 어려운 [성인] 학생들을 모아 교실에 가두고 수학을 가르치라는 학교.
그들은 왜 수학이 취향도 적성도 아니라고 벌써 판명된 대학생들에게 그런 커리큘럼을 강요하는 걸까?
도대체 왜???
한참 묵은 신문을 뒤척이다 한 작가의 기사가 눈에 띈다.
지방 신문에 등단하고 상경했는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고
넉넉하지 않은 부모에게 천만원을 빌려 모교 앞에 카페를 차렸다 망하고 보니 이백만원이 남았더란다.
판 술보다 마셔없앤 술이 더 많을 거라며, 그 와중에 여자친구가 떠났단다, 가난한 남자가 싫다며…
바로 거기, 거기서 뭔가 목에 탁 걸린다.
가난한 건 시작부터 알았겠지. 그 남자는 부자였던 적이 없었으니까.
가난한 것이 싫었다면 만남도 없었겠지.
남들 독립해 살아갈 때 여기 저기 얹혀지내듯 살다
넉넉치않은 부모님께 빌린 돈으로 까페를 차리고도
파는 술보다 마시는 술이 많은 (물론 후배들에겐 넉넉하고 낭만적인 형이었겠지만)
가난한 남자가 아니라 생각없이 그럭저럭 살아가는 남자가 싫었겠지.
어느새 나이는 오십을 바라보고 여전히 미혼.
그리고 그는 여전히 생각한다. 가난한 남자에게 시집오려는 여자가 없다고.
시집, 그게 꼭 누구에게 가고, 오고 그러는 것이라면 아마도
소설가라는 꿈을 앞세워 든든한 숙주도 없으면서 기생하듯 살아가는 남자에게 시집오려는 여자가 없겠지.
많은 사람들은 생각한다, 많은 여자들이 가난한 남자를 싫어한다고.
그런데 문득 가난한 남자를 싫어한다는 것은
성실하지도 치열하지않은, 땅을 딛고 살지않는 삶의 태도를 가진 남자를
싫어한다는 것의 호도된 표현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범죄 프로파일링(? 맞는 말인지…)의 전문가가 말한다.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타고난 괴물은 아니라고…
여러가지 요소들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다고.
무엇이던 듣는 순간 이해는 하지만 담기기보다 흘러가는 와중에 그 중 한 요소가 머리에 콕 박힌다.
경향. 자신에게 다가온 좋지 않은 상황을 다른 사람이나 외부의 환경의 탓으로 돌리는 경향...
거의 매일 마주하는 그 경향이 그렇게 무서운 괴물을 만들 수도 있는 경향이라니…
도대체 그런 경향의 원인은 무엇이고 어떻게 바뀔 수 있는 걸까?
그 것에 대한 언급은 없다. 지금까지 알려진 답이 없다는 뜻일까?
이 나라에서 나랏일 한다는 놈들의 사리사욕 채우기야
뭐 그리 새삼스러울 것 없는 뻔한 이야기지만
통도 크고, 빈도도 잦고 더 뻔뻔하다.
21세기에? 복고가 유행이라더니, retro style?
시대착오적이야. 지겨워. 작작 좀 해먹지?
그들은 자신들을 주인없는 생선가게를 지키는 고양이와 동일시 함에 틀림없다.
우리는 가지런히 진열된 죽은 생선???
그들이 호시탐탐 조금씩 표 안나게 살점을 떼어내려 노리는 생선은
살아도 있고 …
또 그들의 주인이기도 할텐데…
순한 눈 빛을 업신여김을 허락한 거라 생각하는 건지…
꼭 서슬 퍼런 눈 빛을 해야 죽은 생선 취급을 안할지.
참….
이 나라에서 존중받는 국민으로 한 번 살아보고 싶은 마음은 헛된 꿈일까…
토요일 아침 신문을 넘기다 신영복선생님의 글(+그림)을 보고 그간 누군가 콜롬버스의 달걀을 인용할 때 마다 느꼈던 불편했던 심기의 정체를 알았다.
그가 달걀을 깨가며 그것을 세로로 세운 행위는 복종은 알되 존중은 모르는 무자비한 폭력성의 완곡한 표현일 뿐이었던 거다.
그 달걀의 부화 가능성 여부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살아 움직이는 것에만 생명이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에. 세상 어떤 존재에도 운명이라 표현되기도 하는 자신의 고유한 삶의 주기가 있다. 어떤 삶이든 다른 존재들의 그것을 최대한 존중하는 형태로 지속되어야 한다.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 - 한겨례 2012.4.7
아무도 달걀을 세우지 못했지만
콜럼버스 혼자 달걀을 깨뜨려 세웠습니다.
지금도 예찬되는 ‘발상전환’
‘콜럼버스의 달걀’입니다.
500년 동안 군림하고 있는 살아있는 전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달걀을 세우지 못한 사람들은
그것이 살아있는 생명이기 때문에
차마 깨뜨리지 못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콜럼버스의 달걀은 발상의 전환이 아니라
생명에 대한 잔혹한 폭력입니다.
과연 콜럼버스 이후
세계의 곳곳에서 생명이 깨뜨려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잔혹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콜럼버스는 지금도 살아있습니다.
오늘 같은 날
많은 사람들이 특히 바쁘게 움직이겠지만 팔자가 좋은(?) 나는 long holiday weekend를 즐긴다.
느지막한 아침에 며칠 전 선물받은 베트남 산 아라비카 프렌치 로스트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설겆이 하며 들은 남의 나라 대선 후보 경선 소식에 뭔 일이래 인터넷을 뒤지다 또 낚여 삼천포로 빠졌다.
커피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 커피가 오늘 날 문화의 중심에 있기까지 치른 댓가가 있었다는… ^^
목을 내어놓고 마신 이들도 있었고
커피를 탄압하려다 체신을 잃은 왕도 있었고
사탄의 음료인 커피에 굴복(?)한 교황도 있었단다.
… an Ottoman Grand Vizier secretly visited a coffeehouse in Istanbul and … "He observed that the people drinking alcohol would just get drunk and sing and be jolly, whereas the people drinking coffee remained sober and plotted against the government,"
ㅎㅎㅎ… 그리하여 절대권력을 행사하려던 자들이 커피가 두려워 떨기도 했다는…
그러고 보니 아이스크림, 케잌, 초콜릿, 등등 다른 모든 후식은 포기해도 우유를 듬뿍 넣은 쌉쌀한 커피 한 잔은 절대 포기할수 없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유난스러움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