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도시인 팔레르모 호텔만 예약을 해놓을 생각이었다.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었어도 거의 미리 호텔을 예약해두고 여행을 떠났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일정은 세웠어도 그것에 구애 받지 않겠다며, 요즘 숙소 예약이 얼마나 편한데, 나 하나 잘 곳 못 찾겠냐며 팔레르모 숙소만 예약해 놓고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참 어이가 한참 없는 허세였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면 부릴 수 없는... 하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목록이 있고, 하나라도 건너뛰면 맘이 도대체 편치 않은 사람이, 숙소가 좋을 필요는 없어도 깨끗은 해야 하고, 꺼림직한 느낌이 들면 쉬는 게 아니라, 견디며 밤을 보내다 동트자마자 탈출하듯 나올 사람이, 게다가 걸어 다녀야 하니 충분히 즐기자면 위치가 더욱 중요한 상황인데 호텔을 대충 남아있는 것으로 예약을 하겠다니… 어불성설이다.
떠날 날이 다가오자 허세를 걷고 본색을 드러내며 하나하나 쏠락 쏠락 예약을 하게 됐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다 하고 두세 곳만 남은 상태가 됐다. 기왕 이렇게 된 바에 나머지도 하자며 떠나기 전에 다 해버렸다.
그런데 미리 예약하길 백번 잘 했다. 마냥 속편하게 여유 부리는 성격도 아니고, 저녁에 숙소에 들어와서 씻고, 빨래하고, 사진 백업하고, 하루 일과 정리하기도 벅찼는데 이것 저것 고려하며 숙소까지 찾아야 했다면 스트레스 좀 받았을 것 같다. 인터넷도 대부분은 잘 됐지만 잘 되지 않아 당황스러웠던 적도 몇 번 있었다.
무슨 일이든 예산에 구애 받지 않는다면 별로 어려울 것이 없다. 제한된 예산으로 최선의 선택을 하려다 보니 머리가 아파지는 것이다. 숙소를 구할 때 특히 그렇다. 위치와 청결도, 딱 두 가지만 보자 했다.
위치는 안전과도 직결된 문제라 너무 중요했다. 숙소에 들고 나는 시간이 이르거나 늦을 시간일 것이고, 혼자 다닐 것이기 때문에 왕래가 안전한 곳이어야 했다. 그리고 웬만하면 걸어 다닐 것이기 때문에 목적지 접근이 편한 곳이어야 했다. 또, 버스나 기차로 이동할 것이라 버스터미널이나 기차역 접근도 쉬운 곳이어야 했다.
청결도는 생존을 좌우하지는 않아도 복지의 문제라 포기할 수 없었다. 여행을 싫어하지는 않는데, 가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주된 이유가 침대와 화장실 때문이다. 의외로 잠자리와 화장실을 가려서, 화장실 안 가는 것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알 만큼 집 밖에서는 화장실을 잘 안 간다. 외국갈 때 변기도 가져갔다던 미친 짓을 심정적으로는 이해한다. 그래서 지나치지 않은 선에서 최대한 깨끗하다는 평이 있는, 잘 쉴 수 있을 만한 곳을 선택하려 애썼다.
노토noto, 모디카modica 두 곳을 제외하고는 모두 예약한 대로 숙소를 이용했다. 여행을 하다보니 숙소 옮기는 overhead가 너무 컸다. 교통편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피하는 것이 좋을 듯 했다. 그래서 노토와 모디카 숙소를 취소하고 시라쿠자로 몰았다. 노토를 취소한 것은 잘한 결정이었다. 그런데 모디카는 시라쿠자에서 멀고 다음 목적지 라구자ragusa에서 가까워서, 효율성을 생각하면 그대로 두는 편이 나았을 것 같다. 하지만 모디카에 갔을 때, 이상하게 낯섦이 가시지 않는 것이 터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 이런걸까 했고, 호텔을 취소하길 잘했다 하는 생각이 내내 들었었다. 결과적으로 시라쿠자에서 가장 오래 있었는데, 그러면서 여행 중반에 한 숨 돌리지 않았나 싶다.
라구자와 체팔루cefalù는 홈페이지를 통해 예약했다. 홈페이지로 예약을 요청했더니 다음날 이메일로 답장이 왔다. 라구자는 날짜를 변경해야 했고, 체팔루는 예약 확정 방법에 문제가 있어, 두 곳 모두 전화로 문제를 해결했지만, 그런 번거로움을 감수할 만큼 충분히 좋았다.
- 라구자는 수도원을 개조한 전문 호텔이어서 시설, 서비스, 청결도 모든 것이 흠잡을 데가 없었다. 라구자 이블라의 제일 안쪽 끝에 있어 역까지 걷기에 좀 멀다는 것이 흠일 수 있는데, 예쁜 공원 안에 있어서 이른 아침 새소리 들으며 산책도 하고 일출을 보며 건너편 산과 계곡 풍경을 만끽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곳이었다.
- 체팔루는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피정시설 같은 곳이었다. 위치는 더 좋을 수 없이 좋았는데 가격이 믿을 수 없이 저렴했다. 그래서 의심이 들기는 했는데, 평이 좋고, 수도원 시설이라는 점을 믿고 예약했다. 전에 수도원 시설에 묵은 적이 있는데, 시설은 소박해도 깨끗했다. 나한테 호텔은 침대 있고, 화장실 있고, 깨끗하면 완벽하다. 아, 그리고 더우면 에어컨도 있어야 한다.^^ 시설이 생각보다 더 낡고 지나치게 소박해서 처음 내 짝꿍mi compagna 안나(수녀님이 이름이 똑같다고 그렇게 불렀다)가 방을 보여주었을 때 예의상 좋다는 말이 안 나올 정도였다. 그렇지만 깨끗했고, 필요한 것은 다 있었다. 화장실 전구에 문제가 있어 말하니 당장 해결해 주었다. 수도원이라 통행금지가 있을까 했는데 없었고, 다만 아침 7시 이전에 나가야 하면 누군가 문을 열어 주어야 하니 전날 미리 이야기를 해달라는 주의사항이 있었다. 결재는 현금으로 체크인한 다음날까지 해야 하는 등의 작은 규칙들이 있었지만 야박하지 않았다. 부엌이 있어서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도 있었다. 대빵으로 보이는 문지기 수녀님은 터프한 척해도 천진한 장난꾸러기 티가 났고, 안팎을 관리하는 안나도 친척 아주머니처럼 보살피는 마음이 느껴졌고 내 바디 랭귀지도 엄청 잘 알아듣고, 편하고 유쾌했다. 방문을 다 열어놓을 만큼 왠지 마음이 편해 좁은 방이어도 답답하지 않았고, 에어컨 대신 바닷바람으로 더위를 식혔다. 첫날은 파도 소리에 잠을 잘 못 잤는데, 둘째 날은 들려도 수면에 방해 될 정도는 아니었고, 셋째 날에는 똑 같은 파도소리가 요즘 유행하는 ASMR 수준의 달콤한 자장가로 들리는 신기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테라스에 올라가서 쫙 펼쳐진 체팔루 해변을 보며 멍 때리기도 하고 노을도 보고 야경도 보고, 하루는 너무 피곤해서 들어가서 한두 시간 자고 다시 돌아다니고, 진짜 집 같았다. 위치는 5성급 호텔이나 차지할 법한 위치다. 누가 돈 많이 줄 테니 팔라고 호시탐탐 노릴 법하다. 제발 그 자리에 오래 있어야 할 텐데...
다른 숙소들은 booking.com에서 예약했다. 트라파니trapani의 막꼬따maccotta를 제외하고 모두 9점 이상 받은 곳들이었다.
- 막꼬따는 8.x점이었는데 론리 플래닛에 나온 곳이라 론리 플래닛을 믿고 예약을 했으나, 추천하면 안 되는 숙소였다. 좋은 숙소도 많은데, 어떤 저의가 있지 않을까 싶을 만큼 추천의 배경이 의심스러웠다. 위치 말고는 좋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늘 론리 플래닛을 보는데, 시칠리아 편은 오래 돼서 그런지 책만 믿었다가 황당했던 적도 있고, 실망스러웠다.) 시설도 너무 낡았고, 침구도 너무 낡았고, 청결도도 의심스러웠고, 서비스도 형편없고, 영어를 못알아 듣는지 못 알아 듣는 척을 하는지 말도 잘 안 통했고, 사람들도 매우 무례했고 (평을 보면 너무 친절했다는 평이 꽤 있는 것을 보면 차별을 당했던 것 같기도 하다), 위치 빼고는 모든 면에서 형편없었다. 시칠리아를 한 바퀴 돌고 보니, 그 가격에 그런 서비스를 트라파니에서 제공하는 것은 양심불량이다. 론리 플래닛 덕에 버티고 있지 싶은 곳이었다.
다른 곳들은 다시 묵겠냐 물어도 흔쾌히 다시 묵겠다 할 만큼 좋았다. 좋은 숙소를 즐길 시간이 없다는 것이 늘 안타까웠다.
- 팔레르모 숙소는 두 곳인데 위치도 비슷하고 모두 좋았지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단연 알 마씨모al massimo 36이다. 알 마씨모는 주인이 살면서 방 두 개를 B&B로 운영하는 곳인 듯 하다. 객실이 두 개 밖에 없다. 주인의 세련되고 감각적 취향이 그대로 느껴지는 곳이고, 친절을 넘어 정성껏 대접한다는 느낌이 드는 곳이다. 두 숙소 모두 화장실이 전용 화장실이긴 해도 방 밖에 있어 조금 불편하다 했는데, 그런 불편함이 있어도 예약만 할 수 있다면 단연 또 알 마씨모에 갈 것이다.
- 마르살라 호텔은 큰 체인 호텔이라 더 말할 것도 없지만 방이 호사스러울 만큼 좋았고 성당 광장 맞은 편에 있어서 위치가 더 좋을 수는 없었다.
- 아그리젠토 숙소는 다른 곳에 비해 너무 싸서 혹시 도미토리를 잘 못 예약했나 걱정 했었는데, 방도 크고, 넓고 깨끗하고, 완전 시내는 아니었어도 위치가 좋았고, 테라스에서 바다가 보였다. 하루만 묵는 것이 아쉬웠다. 세상 태평하고 인심 좋은 듯 보이는 호스트는 체크인하고 말도 없이 사라졌고, 모든 것은 동네 사람들이 다 해결해 주었다. 숙박비는 어디다 내느냐 물으니 누군가 얼마를 받아야 하냐고 물으며 받고, 짐 어디다 맡겨야 하냐고 물으니 누군가 맡아 주고, 아침은 누가 주냐고 물으니 누군가 와서 더 필요한 것 없냐며 이것저것 챙겨주었다. 말만 들으면 굉장히 엉망진창처럼 들릴 수 있는데, 집 주변에 항상 사람들이 있어서 물어보면 답이 나와 별 불편이 없었고, 서로 속사정 다 알고 내 일 네 일 없이 사는 모습이 신선해 보였고 보기 좋았다. 숙소 이름은 피란델로라는 사람의 이름을 딴 것인데, 피란델로는 아그리젠토 출신으로 시칠리아가 사랑하는 시인이란다. 피란델로의 말로 방 벽을 장식했을 만큼, 시인의 팬이 운영하는 숙소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 엔나 B&B는 특별히 인상적인 것은 없어도 더 바랄 것 없이 좋았다.
- 피아짜 아르메리나의 숙소는 시내 숨겨진 골목 같은 곳에 있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좋았고, 괜찮다고 해도 한 시간이나 이른 시간에 아침밥도 정성껏 챙겨주고, 차로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 줄 정도로 호스트도 너무 좋고, 방도 넓고 잘 꾸며져 있었고 깨끗하고 전망이 엄청 좋은 테라스도 있고, 맛 집 정보 등 지역 정보도 잘 정리돼있었고, 숨겨진 작은 정원도 너무 예뻤다. 그 모든 것을 하나도 즐기지 못하고 늦게 들어가서 잠만 자고 아침 일찍 나와야 한다는 것이 너무 아쉬웠다.
- 시라쿠자 호텔은 시설은 조금 아쉬워도 위치가 아주 좋았고, 충분히 깨끗했고,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했고, 아침마다 성당 앞 광장에 있는 바에서 성당을 바라보며 아침을 먹을 수 있어서 좋았고 (아침 식사 대신 주변 바에서 아침을 먹을 수 있는 쿠폰을 줬다. 내가 묵었던 숙소뿐 아니라 이 동네는 이런 방식으로 운영하는 B&B가 꽤 있는 것 같았다.), 호스트가 매우 친절하고, 말동무도 잘 해주었는데, 영어를 잘해서, 영어로 말하며 내 말을 이해하고 있을까 걱정하지 않으며 편하게 말했던 몇 안 되는 이탈리아 사람 중 한 명이었다.
- 타오르미나 숙소도 흠잡을 곳 없이 좋았다. 위치도 완전 좋고, 호스트나 나나 바빠서 체크인은 007 작전처럼 했고, 호스트 얼굴은 5분 정도 밖에 못 봤지만 세련된 취향의 좋은 사람인 것 같고, 방도 깨끗하고 고급스러웠고, 배가 엄청 고팠는데 간식거리를 챙겨놓은 것도 감동이었다. 부엌이 있었고 경치 좋은 옥상 테라스도 있었다.
이번 여행 최악의 숙소 막꼬따도 위치는 엄청 좋았고 예전 바퀴벌레 나왔던 숙소를 생각하면 절대적 최악은 아니었다. 복을 많이 받은 여행이었다는 생각이 드는데, 숙소가 기여한 바가 컸다.

P.S. 최근 지역에 따라 tourist tax 가 생겼다는 내용이 가이드 북에 있었다. 알아서 하겠거니 하고 내라면 냈다.
숙소에 체크인 할 때 반드시 여권을 보여줘야 한다. 어디서든 다 그랬던 것 같기는 한데... 아무튼 이탈리아에서는 몇십 년 전 일인데 어떤 테러 사건이 있었고, 그 후에 호텔 투숙객 신원을 투숙한 날 자정까지 경찰서로 보내야 하는 법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란다.
아침 식사는 동네마다 숙소마다 제공 여부도 달랐고 제공 방식도 달랐다. 체크인 할 때 말해 주는 경우도 있고, 물어야 대답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침 시간은 대부분 8시부터 10시 사이였는데, 8시에 밥 먹고 나가도 좀 늦다. 이제와 드는 생각인데 숙소가 모두 시내에 있었으니 일찍 한적할 때 아침 산책도 하고 교회는 일찍 여니까 교회도 보고 들어와서 밥 먹고 오전 일과를 시작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