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3.2019

시칠리아 여행: 숙소




첫 도시인 팔레르모 호텔만 예약을 해놓을 생각이었다.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었어도 거의 미리 호텔을 예약해두고 여행을 떠났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일정은 세웠어도 그것에 구애 받지 않겠다며, 요즘 숙소 예약이 얼마나 편한데, 나 하나 잘 곳 못 찾겠냐며 팔레르모 숙소만 예약해 놓고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참 어이가 한참 없는 허세였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면 부릴 수 없는... 하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목록이 있고, 하나라도 건너뛰면 맘이 도대체 편치 않은 사람이, 숙소가 좋을 필요는 없어도 깨끗은 해야 하고, 꺼림직한 느낌이 들면 쉬는 게 아니라, 견디며 밤을 보내다 동트자마자 탈출하듯 나올 사람이, 게다가 걸어 다녀야 하니 충분히 즐기자면 위치가 더욱 중요한 상황인데 호텔을 대충 남아있는 것으로 예약을 하겠다니… 어불성설이다.


떠날 날이 다가오자 허세를 걷고 본색을 드러내며 하나하나 쏠락 쏠락 예약을 하게 됐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다 하고 두세 곳만 남은 상태가 됐다. 기왕 이렇게 된 바에 나머지도 하자며 떠나기 전에 다 해버렸다.


그런데 미리 예약하길 백번 잘 했다. 마냥 속편하게 여유 부리는 성격도 아니고, 저녁에 숙소에 들어와서 씻고, 빨래하고, 사진 백업하고, 하루 일과 정리하기도 벅찼는데 이것 저것 고려하며 숙소까지 찾아야 했다면 스트레스 좀 받았을 것 같다. 인터넷도 대부분은 잘 됐지만 잘 되지 않아 당황스러웠던 적도 몇 번 있었다.


무슨 일이든 예산에 구애 받지 않는다면 별로 어려울 것이 없다. 제한된 예산으로 최선의 선택을 하려다 보니 머리가 아파지는 것이다. 숙소를 구할 때 특히 그렇다. 위치와 청결도, 딱 두 가지만 보자 했다.
위치는 안전과도 직결된 문제라 너무 중요했다. 숙소에 들고 나는 시간이 이르거나 늦을 시간일 것이고, 혼자 다닐 것이기 때문에 왕래가 안전한 곳이어야 했다. 그리고 웬만하면 걸어 다닐 것이기 때문에 목적지 접근이 편한 곳이어야 했다. 또, 버스나 기차로 이동할 것이라 버스터미널이나 기차역 접근도 쉬운 곳이어야 했다.
청결도는 생존을 좌우하지는 않아도 복지의 문제라 포기할 수 없었다. 여행을 싫어하지는 않는데, 가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주된 이유가 침대와 화장실 때문이다. 의외로 잠자리와 화장실을 가려서, 화장실 안 가는 것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알 만큼 집 밖에서는 화장실을 잘 안 간다. 외국갈 때 변기도 가져갔다던 미친 짓을 심정적으로는 이해한다. 그래서 지나치지 않은 선에서 최대한 깨끗하다는 평이 있는, 잘 쉴 수 있을 만한 곳을 선택하려 애썼다.
노토noto, 모디카modica 두 곳을 제외하고는 모두 예약한 대로 숙소를 이용했다. 여행을 하다보니 숙소 옮기는 overhead가 너무 컸다. 교통편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피하는 것이 좋을 듯 했다. 그래서 노토와 모디카 숙소를 취소하고 시라쿠자로 몰았다. 노토를 취소한 것은 잘한 결정이었다. 그런데 모디카는 시라쿠자에서 멀고 다음 목적지 라구자ragusa에서 가까워서, 효율성을 생각하면 그대로 두는 편이 나았을 것 같다. 하지만 모디카에 갔을 때, 이상하게 낯섦이 가시지 않는 것이 터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 이런걸까 했고, 호텔을 취소하길 잘했다 하는 생각이 내내 들었었다. 결과적으로 시라쿠자에서 가장 오래 있었는데, 그러면서 여행 중반에 한 숨 돌리지 않았나 싶다.


라구자와 체팔루cefalù는 홈페이지를 통해 예약했다. 홈페이지로 예약을 요청했더니 다음날 이메일로 답장이 왔다. 라구자는 날짜를 변경해야 했고, 체팔루는 예약 확정 방법에 문제가 있어, 두 곳 모두 전화로 문제를 해결했지만, 그런 번거로움을 감수할 만큼 충분히 좋았다.
  • 라구자는 수도원을 개조한 전문 호텔이어서 시설, 서비스, 청결도 모든 것이 흠잡을 데가 없었다. 라구자 이블라의 제일 안쪽 끝에 있어 역까지 걷기에 좀 멀다는 것이 흠일 수 있는데, 예쁜 공원 안에 있어서 이른 아침 새소리 들으며 산책도 하고 일출을 보며 건너편 산과 계곡 풍경을 만끽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곳이었다.
  • 체팔루는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피정시설 같은 곳이었다. 위치는 더 좋을 수 없이 좋았는데 가격이 믿을 수 없이 저렴했다. 그래서 의심이 들기는 했는데, 평이 좋고, 수도원 시설이라는 점을 믿고 예약했다. 전에 수도원 시설에 묵은 적이 있는데, 시설은 소박해도 깨끗했다. 나한테 호텔은 침대 있고, 화장실 있고, 깨끗하면 완벽하다. 아, 그리고 더우면 에어컨도 있어야 한다.^^ 시설이 생각보다 더 낡고 지나치게 소박해서 처음 내 짝꿍mi compagna 안나(수녀님이 이름이 똑같다고 그렇게 불렀다)가 방을 보여주었을 때 예의상 좋다는 말이 안 나올 정도였다. 그렇지만 깨끗했고, 필요한 것은 다 있었다. 화장실 전구에 문제가 있어 말하니 당장 해결해 주었다. 수도원이라 통행금지가 있을까 했는데 없었고, 다만 아침 7시 이전에 나가야 하면 누군가 문을 열어 주어야 하니 전날 미리 이야기를 해달라는 주의사항이 있었다. 결재는 현금으로 체크인한 다음날까지 해야 하는 등의 작은 규칙들이 있었지만 야박하지 않았다. 부엌이 있어서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도 있었다. 대빵으로 보이는 문지기 수녀님은 터프한 척해도 천진한 장난꾸러기 티가 났고, 안팎을 관리하는 안나도 친척 아주머니처럼 보살피는 마음이 느껴졌고 내 바디 랭귀지도 엄청 잘 알아듣고, 편하고 유쾌했다. 방문을 다 열어놓을 만큼 왠지 마음이 편해 좁은 방이어도 답답하지 않았고, 에어컨 대신 바닷바람으로 더위를 식혔다. 첫날은 파도 소리에 잠을 잘 못 잤는데, 둘째 날은 들려도 수면에 방해 될 정도는 아니었고, 셋째 날에는 똑 같은 파도소리가 요즘 유행하는 ASMR 수준의 달콤한 자장가로 들리는 신기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테라스에 올라가서 쫙 펼쳐진 체팔루 해변을 보며 멍 때리기도 하고 노을도 보고 야경도 보고, 하루는 너무 피곤해서 들어가서 한두 시간 자고 다시 돌아다니고, 진짜 집 같았다. 위치는 5성급 호텔이나 차지할 법한 위치다. 누가 돈 많이 줄 테니 팔라고 호시탐탐 노릴 법하다. 제발 그 자리에 오래 있어야 할 텐데...

다른 숙소들은 booking.com에서 예약했다. 트라파니trapani의 막꼬따maccotta를 제외하고 모두 9점 이상 받은 곳들이었다.
  • 막꼬따는 8.x점이었는데 론리 플래닛에 나온 곳이라 론리 플래닛을 믿고 예약을 했으나, 추천하면 안 되는 숙소였다. 좋은 숙소도 많은데, 어떤 저의가 있지 않을까 싶을 만큼 추천의 배경이 의심스러웠다. 위치 말고는 좋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늘 론리 플래닛을 보는데, 시칠리아 편은 오래 돼서 그런지 책만 믿었다가 황당했던 적도 있고, 실망스러웠다.) 시설도 너무 낡았고, 침구도 너무 낡았고, 청결도도 의심스러웠고, 서비스도 형편없고, 영어를 못알아 듣는지 못 알아 듣는 척을 하는지 말도 잘 안 통했고, 사람들도 매우 무례했고 (평을 보면 너무 친절했다는 평이 꽤 있는 것을 보면 차별을 당했던 것 같기도 하다), 위치 빼고는 모든 면에서 형편없었다. 시칠리아를 한 바퀴 돌고 보니, 그 가격에 그런 서비스를 트라파니에서 제공하는 것은 양심불량이다. 론리 플래닛 덕에 버티고 있지 싶은 곳이었다.


다른 곳들은 다시 묵겠냐 물어도 흔쾌히 다시 묵겠다 할 만큼 좋았다.  좋은 숙소를  즐길 시간이 없다는 것이 늘 안타까웠다.
  • 팔레르모 숙소는 두 곳인데 위치도 비슷하고 모두 좋았지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단연 알 마씨모al massimo 36이다. 알 마씨모는 주인이 살면서 방 두 개를 B&B로 운영하는 곳인 듯 하다. 객실이 두 개 밖에 없다. 주인의 세련되고 감각적 취향이 그대로 느껴지는 곳이고, 친절을 넘어 정성껏 대접한다는 느낌이 드는 곳이다. 두 숙소 모두 화장실이 전용 화장실이긴 해도 방 밖에 있어 조금 불편하다 했는데, 그런 불편함이 있어도 예약만 할 수 있다면 단연 또 알 마씨모에 갈 것이다.
  • 마르살라 호텔은 큰 체인 호텔이라 더 말할 것도 없지만 방이 호사스러울 만큼 좋았고 성당 광장 맞은 편에 있어서 위치가 더 좋을 수는 없었다.
  • 아그리젠토 숙소는 다른 곳에 비해 너무 싸서 혹시 도미토리를 잘 못 예약했나 걱정 했었는데, 방도 크고, 넓고 깨끗하고, 완전 시내는 아니었어도 위치가 좋았고, 테라스에서 바다가 보였다. 하루만 묵는 것이 아쉬웠다. 세상 태평하고 인심 좋은 듯 보이는 호스트는 체크인하고 말도 없이 사라졌고, 모든 것은 동네 사람들이 다 해결해 주었다. 숙박비는 어디다 내느냐 물으니 누군가 얼마를 받아야 하냐고 물으며 받고, 짐 어디다 맡겨야 하냐고 물으니 누군가 맡아 주고, 아침은 누가 주냐고 물으니 누군가 와서 더 필요한 것 없냐며 이것저것 챙겨주었다. 말만 들으면 굉장히 엉망진창처럼 들릴 수 있는데, 집 주변에 항상 사람들이 있어서 물어보면 답이 나와 별 불편이 없었고, 서로 속사정 다 알고 내 일 네 일 없이 사는 모습이 신선해 보였고 보기 좋았다. 숙소 이름은 피란델로라는 사람의 이름을 딴 것인데, 피란델로는 아그리젠토 출신으로 시칠리아가 사랑하는 시인이란다. 피란델로의 말로 방 벽을 장식했을 만큼, 시인의 팬이 운영하는 숙소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 엔나 B&B는 특별히 인상적인 것은 없어도 더 바랄 것 없이 좋았다.
  • 피아짜 아르메리나의 숙소는 시내 숨겨진 골목 같은 곳에 있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좋았고, 괜찮다고 해도 한 시간이나 이른 시간에 아침밥도 정성껏 챙겨주고, 차로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 줄 정도로 호스트도 너무 좋고, 방도 넓고 잘 꾸며져 있었고 깨끗하고 전망이 엄청 좋은 테라스도 있고, 맛 집 정보 등 지역 정보도 잘 정리돼있었고, 숨겨진 작은 정원도 너무 예뻤다. 그 모든 것을 하나도 즐기지 못하고 늦게 들어가서 잠만 자고 아침 일찍 나와야 한다는 것이 너무 아쉬웠다.
  • 시라쿠자 호텔은 시설은 조금 아쉬워도 위치가 아주 좋았고, 충분히 깨끗했고,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했고, 아침마다 성당 앞 광장에 있는 바에서 성당을 바라보며 아침을 먹을 수 있어서 좋았고 (아침 식사 대신 주변 바에서 아침을 먹을 수 있는 쿠폰을 줬다. 내가 묵었던 숙소뿐 아니라 이 동네는 이런 방식으로 운영하는 B&B가 꽤 있는 것 같았다.), 호스트가 매우 친절하고, 말동무도 잘 해주었는데, 영어를 잘해서, 영어로 말하며  내 말을 이해하고 있을까 걱정하지 않으며 편하게 말했던 몇 안 되는 이탈리아 사람 중 한 명이었다.
  • 타오르미나 숙소도 흠잡을 곳 없이 좋았다. 위치도 완전 좋고, 호스트나 나나 바빠서 체크인은 007 작전처럼 했고, 호스트 얼굴은 5분 정도 밖에 못 봤지만 세련된 취향의 좋은 사람인 것 같고, 방도 깨끗하고 고급스러웠고, 배가 엄청 고팠는데 간식거리를 챙겨놓은 것도 감동이었다. 부엌이 있었고 경치 좋은 옥상 테라스도 있었다.

이번 여행 최악의 숙소 막꼬따도 위치는 엄청 좋았고 예전 바퀴벌레 나왔던 숙소를 생각하면 절대적 최악은 아니었다. 복을 많이 받은 여행이었다는 생각이 드는데, 숙소가 기여한 바가 컸다.
 


P.S. 최근 지역에 따라 tourist tax 가 생겼다는 내용이 가이드 북에 있었다. 알아서 하겠거니 하고 내라면 냈다.
숙소에 체크인 할 때 반드시 여권을 보여줘야 한다. 어디서든 다 그랬던 것 같기는 한데... 아무튼 이탈리아에서는 몇십 년 전 일인데 어떤 테러 사건이 있었고, 그 후에 호텔 투숙객 신원을 투숙한 날 자정까지 경찰서로 보내야 하는 법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란다.
아침 식사는 동네마다 숙소마다 제공 여부도 달랐고 제공 방식도 달랐다. 체크인 할 때 말해 주는 경우도 있고, 물어야 대답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침 시간은 대부분 8시부터 10시 사이였는데, 8시에 밥 먹고 나가도 좀 늦다. 이제와 드는 생각인데 숙소가 모두 시내에 있었으니 일찍 한적할 때 아침 산책도 하고 교회는 일찍 여니까 교회도 보고 들어와서 밥 먹고 오전 일과를 시작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




10.21.2019

시칠리아 여행: 계획

자유 여행이 도대체 얼마만인가? 여행 세포가 거의 사멸하였음이 분명했다. 오래 전부터 생각하던 곳이라 지도도 머리 속에 있고, 장소도 방향도 원하는 바도 분명함에도 후다닥 일정이 잡히지 않았다. 아무리 daydreaming과 planning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는 법이라 해도, 인터넷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시절에도 며칠 만에 비행기표에서 호텔까지 다 예약하고 몇 시간 만에 트렁크 챙겨서 공항으로 달려가던 시절이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건 너무했다. 무엇 때문에 신중한 지 모르겠지만 너무나 신중해진 지금의 나는 조금 서글펐다. 아무튼……

결국 일정은 잡혔다. 생각을 거듭하며 최대한 자제하며(과연 자제 했던가?) 과감히(진정 과감했던가?) 뺄 곳은 빼가며 양껏 잡은 일정은 에올리에 제도 Isole Eolie 포함해서 39일이었다. 처음에 무심히 항공권을 알아보려 설정했던 날짜의 기간과 일치했다. 소름…… 가끔 이상한 곳에서 발동되는 촉인가? 대충하나 고민하나 별다를 것 없다는 메시지인가? 항공권 기간에 맞추려면 에올리에 제도만 빼면 됐다. 결재한 항공권은 32일인데 원래 39일로 하려 했었다. 그러다 체력이 버틸까 덜컥 겁이 났고, 값 차이도 꽤 있어 일 주일을 줄였던 것이다. 하지만 일정 변경 비용이 부담스럽지 않은 표를 선택했으니, 더 있고 싶으면 기간을 늘리고 에올리에 제도를 끼워 넣기로 했다.

고심 끝에 잡은 일정이라 그런가 일정이 너무 맘에 든다. 딱 이대로 됐으면 좋겠다. 그런데 마음의 소리가 들린다, 바랄 것을 바라지? 이탈리아가 어떤 나라인데, 한 달 넘는 일정이 계획대로 되길 바라다니, 더구나 남부, 게다가 시칠리아에서. 그런데 왠지 그대로 될 것만 같다. 두고 보면 알겠지.^^

[계획 일정]


P.S. 실행 일정은 다음과 같다. 도시 이동 경로는 노토와 모디카를 제외하고 계획대로 따랐고, 주변 도시 방문은 여러 곳 취소했다. 여행 중간 쯤 되니, 이건 전투지 여행이 아니다, 왜 이러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 시라쿠자부터 여행의 모드를 바꾸었다. 그런데 그랬어도 늘 분주했지 그렇게 여유는 없었다. 가장 여유있었던 곳은 체팔루였는데, 체팔루를 생각할 때 마다 미소가 지어지고 가슴 속에 아름다운 공간이 생기고 그곳으로 신선한 바람이 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을 보면,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많이 보는 여행이 좋은 여행은 분명히 아니다 싶다.
그리고 혹시나 했던 에올리에 제도는 역시 가지 않았다. 안 가봐서 모르는 일이지만, 아무리 유명한 바다라도 바닷가에 가봐야 발은 커녕 손끝도 안 담그고 눈으로 보기만 하는 사람으로서 시칠리아를 일주하며 사면의 바다를 원 없이 본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고, 여행의 끝이 보이기 시작하니까 집에 온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뜨는 것을 보고, 집에 갈 때가 되었다 싶어 그곳은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그리고 간다면 부엌있는 집 빌려서 생선시장에서 장 봐서 밥 해먹고 동네 사람들과 친구하며 며칠 보내며 있기로......

[실행 일정]


다음은 누군가 같은 일정으로 비슷한 여행을 하고 싶다면 추천하고 싶은 일정이다. 미리 알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반영했다. 자연이 아름답다는, 그래서 가보고 싶은 해변도 많지만, 해변 보다는 도시 취향이다 보니, 첫 여행에 이중 어떤 것을 빼고 해변을 넣기는 아무리 생각해도 어렵다. 그리고 계획 속 방문지 대부분이 바닷가에 있어 원하면 바다를 즐길 수 있다. 사실 난 다음 일정으로 기꺼이 시칠리아를 다시 여행 할 의사가 있다. 그곳은 몇 번을 여행한다 해도 아쉬움이 남을 그런 곳이다.
[추천 일정]




시칠리아 여행: 여행의 시작


아침. 눈을 떴다.
늘 하듯 침대에 누운 채 스페인어 페파 피그를 보며 잠을 깨우는 데 난데없이 오른쪽 귀에서 굴착기 소리가 난다. 생전 처음 겪는 일이다. 크기는 작아도 소리와 리듬이 굴착기 소리와 매우 비슷하다. 눈이 침침하면 눈을 비비게 된다, 혹시 나아질까 싶어. 같은 심정으로 귀 주변을 문질러 보지만, 역시 소용없다. 이명과는 완전 다른 종류의 소리다. 귓가의 미세한 소리가 잘 들리는 것으로 보아 청력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난생 처음이니 왜 그러는지 전혀 짚이는 것이 없었다. 그저 하드웨어에 문제가 생길 때가 됐지, 영원한 건강이 네게만 주어질 리가 없잖아 하는 마음의 소리가 들렸다. 내 시간도 끝이 멀지 않음을 알려주는 신호 같았다. 미적거리지 말고 용기를 내어 건강할 때 할 수 있는 것들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요즘 계속 시칠리아 항공권을 검색하고 있었다. 시칠리아는 오래 전부터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한달 일정으로 항공권을 질렀다. 결제 문자가 왔다.
그러자 생일 선물이야, 한 번 갈 때도 됐어, 배낭 여행을 즐길 시간이 얼마나 남았겠어 등등 아침 자각이 준 절박함에 솟구쳤던 용기는 어디로 갔는지 구실을 찾고 변명이 늘어졌다. 감당할 수 있는 일일까, 분에 넘치는 짓은 아닐까 하며 급격히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리고 한편으로 인생의 오춘기를 지나며 뭔들 마음이 편하랴, 매 순간 꼭꼭 채워 살지 않으면 아예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기억하자 싶었다.


You can’t live at all unless you can live it fully, now.
- Alan Watts

서울-팔레르모 왕복(로마 경유). alitalia.com
P.S. 인천에서 바로 시칠리아로 들어가는 카타니아 행과 팔레르모 행 항공편은 모두 밤 9시나 10시 넘어야 도착했다. 밤 도착을 피하려 하니 30 몇 시간 비행에 경유 2회 같은 경로밖에 없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낮에 도착한다면 버스(6유로)로 얼마든지 시내로 들어갈 수 있지만, 첫날부터 자정 무렵에 낯선 도시를 헤매는 모험은 아니다 싶어서, 택시(45유로)보다는 훨씬 싼, 숙소에서 제공하는 pick-up service(40유로)를 이용했다. 팔레르모와 카타니아 모두 late check-in 비용 15유로가 일반적인 듯 했는데, 내가 묵었던 숙소는 pick-up service를 이용하면 late check-in fee를 안 내도 됐다.




10.20.2019

시칠리아 여행: 그 후, 중심과 끝

여행 안내서에서 시칠리아는 이탈리아의 가장 끝에 있지만 지중해를 봤을 때는 지중해의 중심에 있다는 말이 눈에 들어왔다. 중심이냐 끝이냐 안이냐 밖이냐는 위치에 대한 절대적 표현이 아니라 상대적 표현이라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다.

요즘 하도 여기저기에서 들리는 그놈의 인싸·아싸란 말의 영향이다. 그리고 왜 상대적 개념에 굳이 절대적 의미를 부여해서 받지 않아도 될 고통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새삼 의아하다. 그런 사람들에게 중심은, 안은 앞은 누가 정했냐고 물으면, 세상이 정해 놓았다고 세상 핑계를 댈 것 같다. 그것이 많은 사람들이 많은 경우에 편리하게 책임을 회피하는 수단이니까.

중심을 어디로 삼을 지는 자신의 선택이고 그야말로 자유다. 자꾸 중심을 자신이 아닌 다른 곳에 둔다면, 평생 아싸로 살아야 하는 것은 선택에 따른 대가일 뿐이다. 인싸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고통 받는다면, 그건 내 중심에 다른 대상을 기꺼이 흔쾌히 자발적으로 들인 탓이다.

인싸·아싸 같은, 사람을 구분 짓는 단어들이 유행인 것도 우습지만, 그렇게 인간을 구분 짓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인싸를 지향한다는 사실이 더 웃기다. 아웃사이더라는 노래가 있었을 만큼, 아싸가 오히려 매력적이라 여겨졌던 시대가 있었다. 독립적이고 주체적이고 신념이 있는 사람을 표현하는 단어가 아웃사이더였기에. 이 시대의 가치가 위선이 아니라면, 또 굳이 인싸와 아싸가 있는 것이 좋겠으면, 이 시대에도 오히려 아싸를 동경하는 현상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10.17.2019

시칠리아 여행: 피끼딘디아 fichi d’india



시칠리아하면 에트나 화산, 시네마 천국, 대부, 마피아, 까발레리아 루스띠까나, 마르살라 와인, 트라파니 소금, 그라니따, 까놀로 등이 떠올랐었다. 이제 시칠리아하면 너무 많은 것이 떠오르지만 그 중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것은 바다나 하늘을 배경으로 하는 피끼딘디아다.

피끼딘디아는 무화과인 fico의 복수 fichi에 d’India를 붙인 이름이다. 그러니까 인도에서 온 무화과라는 뜻인 것 같다.
이 열매가 열리는 선인장은 옛날, 대부분 주택에 살 던 시절, 집집마다 이 선인장 화분 하나 없는 집은 없을 만큼 흔했던 손바닥 선인장이라고 불렸던 선인장이다. 우리 기후에서도 워낙 잘 자라고 잘 번식했었는데 여기는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기후인지 나무처럼 크게 자랐고, 돌산을 뒤 덮고 있는 모습도 자주 보였다.

[타오르미나: 카스텔몰라 가는 길]

[셀리눈테Selinunte 그리스 신전 앞]

[타오르미나: 배경으로 에트나 화산과 화산이 뿜어내는 연기가 보인다]

[체팔루: la rocca에서 내려다본 cefalù 해변. 회색 방파제가 시네마 천국 찍은 곳]



팔레르모 palermo. 시칠리아에서 보내는 첫째 날 낯설지 않은 선인장이 여기저기 눈에 띄는데 훨씬 크다. 저런 것들이 잘 자라는 것을 보니 기후가 정말 다른 곳이구나 라고 생각하며 그냥 지나쳤었다.



다음날 아침 성당 가는 길에 카포 시장을 지나서 가는데 낯선 과일이 있다. 어제 본 선인장 열매다. 우리나라에서도 제주도에서 많이 난다고 들었다. 백련초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아파트에 서는 장에 가끔 나서 사다가 물에 담가 보라색을 내서 마셨던 적이 있지만 달리 써본 적은 없다. 우리나라에서 본 것은 모두 보라색이었고, 색이 예뻐서 보라색을 내는 용도 정도로 쓰이지 과일로 먹는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은 없다. 그것이 들어간 것은 제주도 기념품 가게에서 보이는 백련초 초콜릿 정도. 그런데 여기 열매는 엄청 크고 색깔도 다양하고 무엇보다 예쁘다. 그리고 과일로 먹는지 까놓은 것을 팔았다. 맛이 너무 궁금했는데 혼자 먹기 많아 보여 그냥 지나쳤다. 그 후로도 볼 때마다 맛이 궁금했지만 같은 이유로 먹게 되지 않았다.





그렇게 낯을 익힌 피끼딘디아는 시칠리아 어디를 가도 있었다. 땅이 없는 곳에서는 화분에서, 건물의 발코니에서, 정원에서, 공원에서, 언덕에서, 고속도로 길가에서, 한마디로 어디에나 있다. 돌산을 가득 덮고 있는 모습도 흔했고, 어딘가 가는 길에는 재배하는지 밭도 있었다. 시장에 예쁘게 포장되어 팔리는 열매는 아마도 밭에서 재배된 것인 듯 하다. 야생 열매는 그렇게 큰 것이 드물었다. 실물뿐 아니라 장식품, 그릇, 기념품, 그림, 간판, 도자기 장식품, 천으로 만든 장식품 등 정말 다양한 용도와 방식으로 표현된 피끼딘디아도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볼 수록 열매가 다닥다닥 달린 모습이 너무 예뻐 계속 사진을 찍게 되었다. ‘그만해, 그러다 피끼딘디아 사진만 천장 찍겠다.’는 마음의 소리가 들렸지만 그래도 또 찍고 또 찍고 그랬다.

[아그리젠토 콘코르디아 신전 앞]


아그리젠토 agrigento의 콘꼬르디아 신전 근처에 그 선인장 몇 그루가 있었다. 남들은 신전 찍느라 바쁜데 난 열심히 그 선인장을 찍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았던지 근처에 있던 아저씨가 그거 이름이 ‘피끼디니아’라며 말을 건넸다. 시칠리아 사람인데 일 때문에 오래 전에 벨기에로 갔고, 지금까지 그곳에서 산단다. 일년에 한두 번 휴가를 보내러 고향에 오는데, 이번에는 딸과 손녀와 함께 와서 신전 구경을 왔다고 했다. 시칠리아 집도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단다. 그런데 아저씨 말이 열매가 엄청 달고 맛있단다. 맛있을 때 이탈리아 사람들이 하는 손짓을 연신 하며 ‘buonissimo’란다. 못 먹어 봤다니까, 꼭 먹어봐야 한다고 한다. 색깔마다 맛이 다른데, 빨간 색이 제일 맛있다고 했던 것 같다. 그 밖에도 몇 가지 맛있는 것을 알려줬는데, 꼭 먹어보겠다고 해놓고 다 까먹었다. ㅎㅎ 아저씨는 시칠리아 집 마당에 그런 것들이 다 있다고 자랑 자랑이다. 그런데 정확히 말하면, 자랑이라기 보다는 늘 그리운 고향에 대한 사랑 같았다. 그래서 널린 것이 그 열매인데 하나 따먹어볼까 싶어서, 따먹어도 되냐고 물으니, 가시가 있어서 맨손으로 까기는 어렵단다. 그래서 맛있는 것들이란 하고 말았다.

정말 맛이 궁금했는데 도대체 먹어볼 기회가 없었다. 한번은 저녁을 먹는데 식당 저쪽 테이블에 피끼딘디아가 한 상자가 놓여있다. 그래서 저거 하나만 먹어봐도 되냐 물을까 말까 열 번쯤은 망설이다 결국 말았다. 한번은 아이스크림 가게에 피끼딘디아 맛이 있어서 먹었는데, 아무리 이탈리아 젤라또가 실제 과일로 맛과 향을 낸다 해도 설탕과 우유, 크림이 잔뜩 들어간 맛이라 궁금함이 해소되지는 않았다. 체팔루cefalù에서는 미국식 주스 바를 발견해서 반가워 메뉴를 보니 피끼딘디아와 멜론으로 만드는 주스가 있었고 당연히 그 주스를 대자로 시켜 마셨다. 역시 멜론이 지배하는 맛이라 제대로 피끼딘디아 맛을 제대로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향은 감이 왔다. 지나가다 본 떨어져 깨진 것에서 나는 냄새나 젤라또에서 나는 냄새, 주스에서 나는 냄새 모두 같았다.

[팔레르모: 마지막 숙소 그림]

시칠리아를 한 바퀴 돌아 다시 팔레르모로에 도착했다. 마지막 숙소에 들어서자 피끼딘디아 그림이 보였다. 작가가 자신만의 예술 세계가 있다 싶기는 해도 피끼딘디아는 분명했다. 왠지 나를 맞고 있는 발레리아가 직접 그렸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물었더니, 자기가 그린 것이 맞단다. 그래서 나도 이 선인장 열매가 좋아서 사진을 엄청 찍었다 했다. 그랬더니 이것은 그냥 선인장 열매가 아니라 이름이 있다고, 피끼딘디아라고 한다. 이 열매의 이름을 한 달 만에야 제대로 알게 된 것이었다. 자기도 피끼딘디아를 너무 좋아한다고. 나폴리 이남에나 있지 이북에는 없단다. 이탈리아 남부의 상징 같은 식물이란다. 그러고 보니 피아짜 아르메리나 piazza armerina 가는 길에 파올라가 (일정이 3일간 겹쳐 계속 만나게 되었던 그녀는 이탈리아 중부 동쪽 해안가에 있는 페자로 라는 곳에 살았다) 버스 운전 기사에게 피끼딘디아를 가리키며 무엇이냐고 물었던 기억이 났다. 아무튼... 사랑하지 않으면 저렇게 말할 수 없다 싶어 시칠리아 출신이냐고 물었더니, 완전 완전 시칠리아 사람이란다. 팔레르모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요즘에는 팔레르모와 라구자를 오가며 살고 있다고. 시칠리아가 너무 좋단다. 여기는 가봤냐, 저기는 가봤냐 계속 물었고, 시간이 없어 거기는 못갔어 하면 ‘peccato, peccato’하며 아쉬워했다. (peccato는 이탈리아 식 what a shame 같은 표현이다) 잠깐 이야기 하는 중에도 이 사람은 시칠리아에 무슨 일이 생기면, 당장 목숨 걸고 레지스탕스라도 될 사람이다 싶었다.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독립자금이라도 댈 것 같은 기세의 진짜 시칠리아의 딸이었다. (조용히 반성했다,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부끄러워했던 적은 없지만 나는 내 나라를 저렇게 좋아하고 자랑스러워했던 적이 있던가.) 아무튼, 가기 전에 꼭 피끼딘디아를 먹어봐야 한단다. 특별한, 뭔가 피끼딘디아 만의 맛이 있단다. 시장에 가면 까놓은 것을 파니 꼭 먹어보란다.

[팔레르모 카포 시장: 깐 피끼딘디아]

숙소에 체크하고 배낭을 놓고 노르만 궁 palazzo dei normani에 가려 나왔다. 구글 지도 경로를 살짝 비켜 카포 시장 쪽으로 갔다. 그날 아니면 피끼딘디아를 먹을 기회가 없을 것 같아 먹고 가려는 꿍꿍이였다. 점심시간 무렵이었는데 시장 입구 과일 가판대가 아직 철수 전이었고, 까놓은 피끼딘디아도 있었다. 접시마다 색깔 구성이 달라 어떤 것이 맛있냐 물으니 다 똑같단다. 아그리젠또 아저씨는 더 맛있는 색이 있다고 했는데 하며, 되도록 양이 적어 보이는 것을 골랐다. 들고 가며 먹을 수는 없을 것 같아 매대 한 귀퉁이에서 서서 먹고 가기로 했다. 포장을 벗기고 설레는 마음으로 한입을 먹었다. 잉??? 맛이고 뭐고 일단, 씨가 입안에 가득하다. 큰 포도 씨만하고 단단해서 씹을 수도 삼킬 수도 없다. 아무도 씨 이야기는 안 했다. 맛은? 건강한 것, 채소, 해초 같은 것 좋아하는 사람이면 먹을 만한 맛이랄까. 그렇다고 절대 고역스러운 맛은 아니다. 향은 약한 풋내 정도. 씨 뱉을 곳을 찾아 주변을 보니 과일 껍질이 담겨있는 상자가 보였다. 그래서 거기에다 푸푸 씨를 뱉으며 먹고 있는데 한 상인 아저씨가 ‘시뇨라, 시뇨라’ 하며 누구를 부른다. 그래서 보니 나를 부르는 소리였다. 그래서 쳐다보니, 뭐 하는 짓이냐는 말을 이미 표정이 하고 있다. 다 먹는 것이란다. 씨 채 다 먹으면 씨는 다 어딘가로 나온단다. 그래서 보니 오후라 한가했던 주변 상인들 모두 나를 유심히 보고 있었다. 용감하게 나를 불렀던 상인은 말에 바디 랭귀지를 동반했기 때문에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못 알아 듣는 것이 불가능 했다. 그런데 못 알아들었는 줄 아는지 주인 허락도 없이 포장된 것을 뜯어 하나를 통째로 입에 넣었다. 그러고는 우물우물 다 삼키고 입을 아~ 벌리고 혀를 쭉 빼고 자기 입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보여준다. 참 나. 알았다고 노력해보겠다고. 하지만 한 입 또 먹고 아무리 씨를 삼키려 해도 입안에 남았다. 내게 꽂힌 시선이 한두 개가 아니라 눈치가 보여 노력은 했으나 삼켜지지 않았다. 뭐, 내가 씨 좀 뱉었기로, 니들이 뭘 어쩔 건데 하는 마음으로 그냥 뱉었다, 푸푸~

총 다섯 개의 피끼딘디아 중에 두 개를 먹고 나니 누가 하나쯤 먹어주면 고마울 것 같았다. 아직 시칠리아 햇빛을 덜 받아 하얗고 통통한 꼬맹이가 아까부터 옆에 앉아 햄과 치즈를 넣은 빠니니panini를 먹으며 슬쩍슬쩍 나를 보고 있었는데, 과일가게 주인을 똑 닮은 것이 아들로 보였다. 그래서 넌지시 너는 이거 좋아하냐 물었다. 좋아한다면 두 개쯤 넘길 생각이었다. 그런데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러며 자기는 안 먹는단다. 서운한 대답이긴 했지만 충분히 이해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래도 진짜 건강에 좋을 것 같아서, 칼로리도 높지 않을 것 같아서, 씨 뱉는 것도 뭐라 하는데 버리기 까지 하면 ‘시뇨라, 시뇨라’ 하며 따라올 수도 있다 싶어서 (농담) 꾸역꾸역 다 먹었다.

[팔레르모 카포 시장: 처음 시장에 갔던 날 사진을 보니 그 가판대가 오른쪽에 살짝 찍혔다. 여전히 까놓은 피끼딘디아가 보이고, 수레를 끄는 청년은 과일가게 집 큰 아들인 듯. 그날도 오가며 꼬맹이와 장난을 치며 놀았었다. 삼 부자의 얼굴이 한 얼굴의 어른 버전, 청년 버전, 어린이 버전인가 할 정도로 닮았다.]


먹는 내내 아그리젠토 아저씨가 계속 생각났다. 선해 보이는 외모에 당한 건가? 그 아저씨 네 마당에 있다고 했던 것을 먹었어야 했나? 진짜 달고 맛있는 피끼딘디아가 있기는 할까? 발레리아는 고유한 맛이 있다 했지 달고 맛있다고는 절대 말하지 않았다. 사무치게 그리운 고향의 맛이라 무조건 달았던 것이었을까? 뭔가를 그리워하다 먹으며 꿀맛이라고 하는 것 같은 표현 법이었나? 진실은 그야말로 저 너머에…

그렇지만 다시 시칠리아는 간다면 또 먹을 것 같다. 누군가 그렇게 사랑하는 그 맛을 이해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


10.14.2019

시칠리아 여행: 그 후, 다시 읽는 여행 안내서



뒤 늦게 찬찬히 여행안내서를 읽는다. 갈 날 받아놓고는 그렇게 안 읽히던, 의무감에 마지못해 읽었던 글이 이제는 애니메이션 마냥 동적이고 소리와 냄새도 나는 듯 생생하다. 뭐래~~^^
아무튼 시칠리아의 가장 유명한 소설에서 나왔다는 다음 문구가 있었고 머리가 띵 했다.

[palazzolo acreide]

[erice: 두 절벽 끝에 서있는 페폴리 탑(torretta pepoli)과 비너스 성(castello di venere)이 보인다]


“The violence of landscape, this cruelty of climate, this continual tension in everything, and even these monuments of the past yet incomprehensible because not built by us and yet standing round us like lovely mute ghosts… All these things have formed our character…”
The Leopard by Giuseppe Tomasi di Lampedusa

아마 이 문구가 내 머리 속에 있는 상태로 시칠리아를 만났다면 글에 생각이 지배당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그럴 정도로 호떡집 불 난 듯 돌아다니는 와중에 잠깐 잠깐이었어도 강렬하게 느껴졌던 그곳과 그곳 사람들이 간결하고 명쾌하게 표현되어 있다.그리고 막연하고 아련했던 그리움의 형체가 보이기 시작하는 느낌적인 느낌…이 책의 원제는 It Gattopardo이고 역사소설로 분류되고 19세기 초 시칠리아 귀족사회의 몰락을 다루었다고 한다. 이탈리아 학교에서 지정한 권장도서 목록에 있을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는 책이고, 다시 말하지만, 시칠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소설이란다.



10.02.2019

시칠리아 여행: 그 후 4일째, 비빔밥




다른 나라 음식도 잘 먹는다. 다만 고수를 비롯한 향신료에 약해서 향만 강하게 쓰지 않는 곳이라면 어디든 김치 먹고 싶다 하지 않고 잘 먹고 지낸다. 그런 자신감에 근거해서 여행길에 고추장 튜브 하나, 믹스커피 하나도 안 챙긴다. 그렇다고 현지식만 고집하지 않는다. 한식당이 있으면 가기도 하고, 오랜만에 먹으니 너무 맛있다며 엄청 잘먹는다.

외국 중 이탈리아는 더 걱정이 없다. 음식도 웬만큼 알고, 메뉴판도 웬만하면 읽을 수 있고, 치즈, 생 햄은 아무리 먹어도 질려 하지 않는다.


오는 비행기에서 내리기 전 아침 식사를 준다. 살구 쨈이 든 크루아상, 빵, 생 햄, 치즈 등. 보기에는 모두 별로다. 크루아상은 한 입 먹으니 더는 못 먹겠다. 드디어 식욕을 잃었네 하며 한편 기뻐했다. 그런데 안 먹으면 다 버릴 것이라 생각하니 아깝다. 빵을 갈라서 버터 바르고 생 햄과 치즈 넣어 샌드위치나 만들어 볼까 싶었다. 한 입 먹으니 웬걸... 식욕이 순식간에 돌아왔다. 너무 맛있다. 어떻게 이것은 이 상황에도 맛있냐 하며 끝까지 다 먹었다.


이탈리아 식재료에 대한 내 유난스러운 사랑에도 불구하고 이번 여행에서는 유난히 채소가 고팠다. 샐러드로 먹는 생 채소 말고 우리 식 채소 음식이 그리웠다. 나물, 찌개, 국, 조림...


멸치 넣고 조린 꽈리고추 조림에 흰 쌀밥 한 숟갈 먹는 장면이 뜬금없이 떠오른 적도 있었다. 꽈리 고추 조림은 좋아하긴 하지만, 흰 쌀밥은? 흰 쌀밥을 먹는 일이 거의 없는데... 여행 막바지에는 나물 듬뿍 든 비빔밥이 자주 먹고 싶었다. 채소가 이렇게 싸고 흔한데, 이런데서 비빔밥 집 하면 대박일 텐데... 그리고 비빔밥에 꼭 무 생채가 들어갔으면 좋겠다. 나도 모든다, 내 바람의 출처를. 그냥 그랬으면 좋겠었다.


동네에서 제대로된 비빔밥 먹을 곳이 떠오르지 않는다. 여독으로 몸은 무거운데 장에 가서 채소 몇 가지를 사다 직접 만들었다, 채소 듬뿍 넣은 비빔밥을. 무 생채도 듬뿍...


P.S.
그렇게 이탈리아 음식 좋다고 맛있다며 먹을 때는 언제고, 오자마자 해독을 해야 한다며 해독쥬스를 만들려 브로콜리 사다 시칠리아가 너무 그리웠다. 거기에서는 믿거나 말거나 내 머리통만한 브로콜리가 1유로였는데, 중국산 주먹보다 조금 큰 브로콜리가 천오백 원이다. 심지어 곰팡이가 피고 있는 것도 팔았는데 980원이었다. 국내산은 그야말로 보통 어른 주먹만한 것이 사천원에 가깝다. 양파는 수확도 안하고 엎어버린다는 뉴스를 몇 달 전에 들은 것 같은데, 작은 것 열개 쯤 든 것이 삼천원. 농수산물이 이렇게 비싼 나라는 아직 못 봤다. 수익이 생산자에게 노동의 댓가만큼 적절히 돌아간다면 바싸다고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얼마전 TV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소매도 아니고 도매로 삼천원에 팔리는 배추를 농부는 이백오십원에 유통업자에게 넘겼단다. 유통이 열배도 넘는 부가가치를 창출하나??? 이런 것이 바로 마피아 식 mafioso이 아닐까...

10.01.2019

시칠리아 여행: 그 후 3일째

여행에서 돌아온지 3일째.
사진, 메모, 비용 등을 정리해 컴퓨터로 옮기는데, 워낙 양이 많아 밥 먹고 계속 책상에만 앉아있게 된다.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정리해 기록해두려 하니, 더욱 그렇다.
매일 만보, 이만보씩 걷다가 갑자기 정지. 다리가 그렇게 부려먹더니... 죽은 거야? 할 것 같아 잠시 동네를 한바퀴 돌고 들어왔다.

시칠리아 거리에서 집에 돌아갈 날을 꼽아보다 문득, 집에 가서 현관 문을 열면, 한 달 동안 갖혀있던 공기가 병조림 뚜껑 열 때처럼 폭 소리를 내며 튀어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런데 그러지는 않더라. ㅎㅎ 하지만 왠지 낯설다. 또 다른 B&B인가 싶다. 간만에 집 비운다고 평소 같지 않게 너무 정리를 해둔 모습이 낯설었나? ㅎㅎ

아주 오랜 만에 집에 온 느낌이었다. 여러 의미로 평소 몇 십배의 강도로 지내서 그렇지 싶다. 적어도 1년 같은 한달……

실제로도 한 달 치고는 적지않은 변화가 있었다. 10년 넘게 애용하던 과일 가게가 문을 닫았고, 걸어서 10분쯤 거리에 공사중이던 큰 쇼핑센터가 문을 열었고, 근처 재개발을 기약하며 방치돼 있던 꽤 넓은 지역의 재개발이 시작됐다. 오래된 건물과 집들이 다 철거되고 공사장 펜스가 세워졌다.

당분간 아파트 주변이 온통 공사장이겠구나, 그나마 트여있던 남쪽과 동쪽 시야도 새로 지어지는 고층 아파트로 모두 막히겠구나, 좌석버스 같던 시내버스의 혜택이 끝날 날도 이제 머지 않았겠구나.

그래, 여행은 잠시 두 눈 뜨고 맨정신으로 꾸는 꿈이고, 이게 현실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