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9.2007

우리의 뜻을 다시 한번 밝힌다.



교지, 써클 소식지, 돌리고 남은 논문 등을 넣어둔 상자 속에서 '우리의 뜻을 다시 한번 밝힌다. (전국 교수 시국 선언문)'라는 제목의 인쇄물 발견.

하하... 상자 속에 고이 보관한 이것이 무엇이란 말이야... 날짜도 없고, 언제인지 기억도 없다. 종이 는 누렇게 뜨고 가장자리가 너덜너덜 하다. 분위기로 보아 아마도 87년 전후 즈음에 생산된 불온문서(?)지 싶다. 타자 글씨체에 등사기로 밀고, 나름 멋은 있지만 인쇄 질이 별로 높아보이지 않는 것이, 뭐든 색안경을 쓰고 보던 시절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불온한 냄새를 확확 풍긴다.

멀지 않은 과거인데 이런 비장한 선언이 필요할 만큼 억압적인 시대였다는 것이 새삼스럽고, 비장하다고는 하나 완곡하기 그지없는 교수님들의 문구에 해방감을 느낄만큼 나 또한 자유롭지 못하다 느끼며 그 시절을 살았구나 싶기도 하고... 교정 어느 구석이었겠지만 길에서 주운 불온문서^^에 감동하여 가방에 챙겨와서 고이 보관한 청년 '나'의 모습이 반갑고 흐뭇하다. ^^

하지만 20년을 고이 보관했던 선언문은 이제 기억의 저편으로... 다시 20년이 흘러 문득 40년 전의 나를 발견하면 지금보다 훨씬 더 반갑고 흐뭇하겠지만, 한 동안 까닭 모르게 쌓여있는 것들과 씨름을 하다보니 아무리 가벼운 종이 두장이라 하더라도 무게와 부피가 있는 무언가를 남기고 싶지가 않다, 다시 그 모습을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 하더라도...

10.28.2007

추억


이사가기 전 마지막 주말.
할머니의 이사를 알게 된 후 간간히 할머니 집이 없어진다는 것에 대한 서운함을 표현하더니, 오늘은 할머니 집에서 보낼 수 있는 마지막 날이라며 모두 따라 나선다. 다신 못오겠다 하길래, 여기 살게되는 수녀님이 나중에 놀러와도 된다고 했다 하니 '진짜?' 하며 표정이 한껏 밝아진다. 무언가가 과거가 된다는 것이 미래 말고는 모를 것 같은 어린 녀석들에게도 서운한 일인가보다.

모두 몇 년 씩 어린 시절을 보낸 적이 있는 할머니 집. 지렁이, 메뚜기, 잠자리, 달팽이, 나비, 벌레들, 곤충들, 고양이, 꽃, 풀, 나무, 돌맹이, 포도, 감... 손바닥 만한 마당이지만 호기심 넘치고 천진한 녀석들을 즐겁게 해줄 만한 것들은 언제나 충분했고, 어른 들에겐 세월이 쌓아놓은 그다지 쓸모도 없고 버리기도 쉽지않은 귀찮은 것들에 불과하지만 녀석들에겐 신기하고 재미있는 놀잇거리인 온갖 잡동사니들이 여기 저기 들치기만 하면 나타나는 곳이기도 했다.

오는 차 안에서는 안도 밖도 모두 사진을 찍겠다는 둥 잠시라도 경건히(?) 보낼 것 같은 분위기를 한껏 자아내더니, 대문에 들어서자마자 짐 정리에 뭍어 밖으로 나와 여기 저기 널려있는 물건들을 가지고 취향껏 제멋대로 신나는 놀이에 빠진다.

짧지 않은 삶의 반을 살았던 공간과의 이별(?)을 앞에 두고 까닭 모르게 불안, 초조, 섭섭, 심란... 마음을 어떻게 종잡을 수가 없는데 무엇이든 밝고 맑게 담기는 녀석들의 마음 덕에 즐거운 추억 한 조각이 늘었다.


* 모두 머리에 쓰는 것으로 보였는지 일단 쓰고 본다.. ^^ 이 것의 이름은 용수, 익은 술 독에 박아 술을 거른다. *



* 심은 것, 씨가 퍼진 것.. 때가 되니 여기저기 국화가 폈다 *


* 세 녀석이 물려쓴 주워온 자전거. 훨씬 크고 좋은 자전거가 있음에도 아기 때 타던 낡고 때탄 것을 아쉬워한다. 고모가 사진으로 남겨줄께..^^ *


* 높기만 한 감... *


* 과연 형아가 감을 따 줄 수 있을까??? *


* 형아가 목마 때워줄께. 네가 따... *


* 누나, 빗자루 타고 소금 얻어올께 *


* sweet tooth를 가진 우리 수O, 소금 대신 설탕으로 주면 안되요??? *


* '고모, 그런데 쌀이 밖으로 다 나가면 어떡해?' '어떡하긴... 시어머니에게 당장 쫓겨나지..' 뭐든 열심히하는 녀석... 팔 아프다고 하면서도 쫓겨나지 않을만큼 키질을 할 수 있게 되고 말았다. ^^ *


* 꼬마 마법사??? 왠지 빗자루만 보면 자꾸 타게 되더라... *



10.02.2007

맛있는 일기



같이 살던 조카의 분가. 녀석의 짐을 챙기는 것을 돕다 일기장 뭉텅이가 발견됐다. 2~3년간 매일 저녁 극성맞은 고모의 닦달로 남겨지게 됐다는 슬픈 사연이 있는 일기장들. “오늘은 삼겹살을 먹었다. 참 맛있었다. 오늘은 할머니께서 비비큐를 사 주셨다. 참 맛있었다. 오늘은 자장면을 먹었다. 참 맛있었다……” 하하하, 깔깔깔. 마지못해 할 수 없이 썼던 티가 역력하지만 그 와중에 녀석의 천성이 묻어 나온다. 별 것 아닌 접시 앞에 두고 마냥 행복해지던 천진했던 시절의 모습에 나도 녀석도 모두가 즐거웠다.

속 모르는 남들 보기에 멀쩡한 회사를 그만 뒀다. 모두 월급쟁이의 신세타령쯤이라 생각했던 식당 차리겠다는 말을 실행하겠다며... 그것도 이탈리아 식당을, 그것도 처음부터 배워서... 그리고 조리 복에 앞치마 입고 나서더니, 이역만리 이탈리아까지 가서 초등학생 조카 녀석의 것과 다를 바 없는 일기를 나도 썼었다. 두 줄을 넘지 못했던 녀석의 일기는 유전...

산해진미도 아닌 음식에 더없이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소년의 마음으로나 가능한 일. 잠시 만사를 접어두고 지친 마음을 달래던 시간의 기록. 단순하고 행복하고 싶었고 단순하고 행복했던 순간의 기록.

녀석의 일기도, 내 일기도 맛있게 이어지는 삶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