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2.2006

자연인 나?


백수생활 한달 남짓.
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해도 제가 듣고 싶은 말만 듣는다고 하더니, 평생 한 번 본 사주풀이 아주머니의 어떤 말은 믿을 생각도 따를 생각도 전혀 없으면서 '휴가론'을 철저히 믿고 따르고 있다. '휴가론'의 요지는, 그동안 열심히 일해서 쉴 때가 되었고, 쉴 수 밖에 없었고, 적어도 당분간은 조급히 뭘 하려들지 말고 그저 아무생각 없이 푹 쉬라는 것. 때로 신문 구인 광고 모집부문에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아주머니의 말을 떠올리며 외면할 정도로 철저히 따른다.

도대체 뭘 하는지 일주일 단위로 하는 일을 상세히 이야기해보라고 하는 사람도 있던데, 상세히 이야기 해보면 이렇다.

매일 아침 집 또는 동네 운동시설에서 요가하고.
책 읽고.
안 보던 신문도 보고.
그래도 눈감고 음악감상할 여유는 없어 음악은 다른 일 할 때 방해되지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로만 즐긴다.
오래 못 만났던 사람들도 만나고.
이탈리아어 배우고, 숙제, 복습하고.
번역강좌 듣고, 숙제하고.
블로그질하고.
그날 그날 한 일 기록하고.
백수로 최소한 해줘야 할 일 같은 가계부(?) 혹은 금전출납부 쓰기 하고.
주 중 백주 대낮에 친구들 만나고.
백수다운 마음가짐을 잃지 않으려 애쓰고. 예를들면,
TV가 땡기는 날 마냥 소파에 누워 TV 보며 'feel guilty'하지 않기.
다음 날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서둘러 잠자리에 들지 않기.
무엇엔가 붙들였을 때 다른 것을 해야한다는 생각으로 서둘러 그만 두지않기.
해야만 하는 일은 최소로 하기. 설사 미루거나 하지않았어도 반성하지 않기.


그러며 보낸 한달 사이, 바로 전 10년 남짓한 세월을 까맣게 잊었다. 내가 뭘 하던 사람인지...

마치 관련된 기관의 절제 수술을 받은 것처럼 아무런 느낌이 없다. 사람들은 기억 때문에 절단한 다리에 통증을 느끼기도 한다던데, 난 그 기관에 대한 기억조차 남아있지 않은 사람처럼 무감각하다. 수학 학도로서의 10년 후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했던 것처럼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또는 IT 전문가로서의 10여년이, 순간 내 의식에 어떤 영향도 더 이상 주지 않는다. 일을 하는 환경이나 구조, 조직 안의 논리 등 주변적이나 일에 너무 큰 영향을 미치는 이유들로 회사를 떠나기로 했었고, 언제나 일 자체를 좋아했으면 좋아했지 싫어한 적이 없는데, 그 '일 자체'라는 것 또한 마음에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않은 것 같다. 어떻게 이럴수 있을까...

사회인으로서 나는 백수 한달 남짓한 사이 그 어떤 흔적도 모두 사라지고, 오롯이 自然人 내가 남은 것 같다.

4 comments:

asterope said...

다음 날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서둘러 잠자리에 들지 않기.
무엇엔가 붙들였을 때 다른 것을 해야한다는 생각으로 서둘러 그만 두지않기...
아직 그러고 사는 사람으로서, 정~말 정말 부럽기만 합니다...

asterope said...

날이 갑자기 더워졌어요...
어찌 지내시는지요?
바깥 날씨는 화창 그 자체입니다...
이런 날 사무실에 해진 후 까지 남아있어야 함은 참으로... --;;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 행복하셈~~

sunny said...

글이 참 맘을 여유롭게 하네요
나도 여유를 가지고 생활해야 겠다는 생각을 들게 해줘요
며칠전부터 함 가서 글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뭐가 그리 바쁜지 이제야 들어와 봅니다... 호호
부서 이관으로 괜히 맘만 어수선하더니
책상서랍과 책장에 있던 무수히 많은 것들을 버리고 나니 맘도 함께 홀가분해 지네요...
4년전 분명히 빈손으로 왔는데..그 사이 무슨 짐을 그리도 늘렸는지..
이번엔 노트북 하나 달랑 들고 가야지 했는데도 여러권의 책과 군더더기 짐이 조금 남았습니다.
사람이란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그런 존재인가 봅니다.
뭐가 그리 급한지 .. 갑자기 서둘러서 담주 월요일부터 선릉으로 출근해요
어딘가로 훌쩍 떠나시기 전에 꼬~옥 얼굴 함 보여주시고 가세요
오히려 회사를 떠나고 나니 다정한 언니가 되어서 더 좋은거 같아요 ^^

anna said...

Buonasera 선O, 윤O책임! 이렇게 온라인으로 만나는 것도 무지 반갑다. 학교 다닐 때도 회사 다닐 때도 좋은 계절엔 늘 할일이 많았던 기억이 있어요. 봄이건 가을이건 그 화사한 계절을 뒤로 하고 도서관이던 사무실이던 입구를 향해 걸을 때, 호랑이 입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만큼 무섭지는 않아도 싫은 정도는 비슷했어요. ^^ 원래 뭐든지 가질 수 없을 때 빛나보인다더니 날씨도 예외는 아닌가봐요. 날씨가 더워도 아직은 좋죠... 막바지에 다른 이 계절을 고마워하며 즐기고 있죠.
이젠 파랑새가 내 가슴 속에 있다는 걸 안다고 생각했었는데, 선O, 윤O책임의 댓글을 읽고 문득 파랑새를 찾기위한 또 다른 여행을 시작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파랑새를 가슴에 품고 사는 삶과 그걸 찾기위한 삶은 어떻게 다를까요??? (ㅎㅎ... 한가한 것을 어찌 숨길수 없네.)